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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ㆍ자기계발

독서는 왜 지루한 걸까?

by Catsby. 2023. 6. 6.

https://youtu.be/0HASNx2Sz8s

 

 

 

아기는 생후 3개월이 되면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12개월이 지나면 엄마, 아빠 같은 단어를 말할 수 있습니다. 5살이 되면 어른과 비슷한 수준의 발음을 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도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웁니다.


말 배우기는 이렇게 쉬운데 읽기와 글쓰기는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요? 말을 못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자를 모르는 사람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최근에는 실질적 문맹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죠. 독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독서를 해보려 책을 들고 누우면 금방 잠이 쏟아집니다. 읽고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책에서 멀어집니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노암 촘스키는 아동은 언어 습득 장치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들은 수업을 듣지 않아도 모국어를 쉽게 이해하고 배웁니다. 제2 외국어도 성인보다 훨씬 빨리 배우죠. 아이들은 언어의 천재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경험과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성장기에 적절한 언어 경험을 겪지 못하면 타고난 능력은 퇴보하고 영영 잃어버리게 됩니다.


야생에서 길러진 아이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글리 신드롬은(Mowgli Syndrome)은 어린 시절 언어 환경에 노출되지 못하면 나중에 교육을 받아도 언어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글북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인 모글리에서 따왔죠. 늑대에게 길러져 교육을 받아도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소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능이 발달하려면 환경과 양육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서도 책은 여전히 지루하고, 낯섭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죠. 독서와 글쓰기가 생업인 작가들도 글을 단박에 써내려 가지 못합니다. 우리에겐 읽기와 쓰기 본성이 없습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말하기 능력을 가지고 읽기와 쓰기에도 억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기에, 매번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조상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광원인 형광등 앞에서 사물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처럼, 몇 시간씩 책상에 앉아있는 것도 곤욕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성 자체가 아닙니다., 본성이 어떤 환경에서 진화했고, 어떻게 현재 사용되는지가 중요합니다. 진화는 환경과 경험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진화심리학 또한 환경과 본성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가지는 학문입니다. 현대인의 마음과 행동 양식은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냥하기, 식량 구하기, 맹수로부터 도망치기, 가족 보호하기, 주거지 확보하기 등의 행동은 사바나 초원의 환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모든 진화한 심리에는 환경이라는 배경 조건이 있습니다. 이를 진화적 적응 환경(EEA)이라 합니다. 


 따라서 후손인 우리들도 조상들이 겪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심리 기제가이 있습니다. 저번 영상에서 말한 영역특이적인 기능입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기능들을 프로그램으로 비유합니다. 인간에게 내장된 수많은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거나 하고 싶도록 만들고,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특정 생각에 이끌리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거나, 배신자에게 분노하거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향 말이죠.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모여 인간의 문화를 형성하는 기반이 됩니다. 자연이 초고를 주면, 경험이 수정을 가해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결국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경험과 환경, 양육이라는 입력이 있어야 합니다. 입력이 없으면 출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굳은살의 메커니즘은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지만, 지속적인 피부 마찰이 있어야만 굳은살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굳은살은 피부가 쓸려 상처를 입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포식자 피하기 본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려는 본능은 경험과 상관없이 3~4세가 되면 자연스럽게 발달합니다. 하지만 본능은 경험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경찰과 도둑, 얼음땡 같은 추적 놀이를 통해 포식자 피하기를 연습하고 발전시킵니다. 놀이는 본능을 갈고 다듬어 발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각각의 프로그램은 특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호저의 가시는 포식동물을 물리치는 데 쓰이고, 거북의 껍데기는 연약한 장기를 보호해 줍니다. 핀치새의 부리는 견과류를 깨는데 도움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목적은 누군가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변이가 오랜 시간을 거쳐 누적된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도킨스는 이를 '눈먼 시계공'이 설계했다고 말합니다.

 유기체는 세계에 관한 지식을 이미 구비한 채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은 쉽게 배우지만, 어떤 행동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 배우거나 배우지 못합니다. 사실프로그램이 발달할수록 무언가를 더 잘 배우고, 더 유연해집니다. 사람들은 선천적 기제가 많을수록 행동의 유연성이 위축될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반대입니다. 본능은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다양하게 만듭니다. 목수의 연장통을 생각해보죠. 목수는 연장통이 다양할수록 더 다양하고 수준 높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의 일반적인 도구로는 여러 작품을 만들 수 없죠. 


 진화는 기능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인간의 눈은 시각을 위해 진화했으나 소통의 수단으로도 이용됩니다. 인간에게만 있는 흰자위를 이용해 우리는 의도를 표현하거나 눈치챌 수 있습니다. 눈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고 욕을 할 수도 있죠. 


-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타인의 표정을 읽는 심리 기제가 잘 발달했습니다. 너무 잘 발달한 나머지, 점 두 개와 작대기 하나만 그어도 표정이 있다고 착각하죠. 이모티콘이 그 예입니다. 프로그램이 인간의 행동을 위축시킨 게 아니라 더 확대하고 발전시킨 사레입니다. 


진화론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본능을 추론이나 학습의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우는 능력 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입니다. 이런 능력은 노력이나 교육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발달하고, 기초에 깔린 논리를 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합니다. 아이들이 문법을 몰라도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는 것처럼요. 


- 환경결정론자들은 이런 학습 능력이 모든 역할을 한다고 착각합니다. 사실은 학습 프로그램이 너무 잘 작동하다 보니, 의식되지 않을 뿐입니다. 정보를 너무 쉽고 자동적으로 처리하다 보니, 본능적인 직관을 객관적인 속성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능 프로그램이 항상 완벽하진 않습니다. 특히 과거와 지금의 환경이 다르다면요. 기름진 음식과 단맛을 좋아하는 경향은 먹을 것이 부족하던 과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비만과 동맥경화를 일으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뱀을 보면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도록 진화했습니다. 과거엔 뱀은 영장류의 생존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뱀에 물리지 않기 위해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비용이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뱀에 물릴 수 있어도 산에 오릅니다. 지금도 매년 수천 명이 뱀에 물리고 일부는 사망하지만, 대체로 뱀에 대한 공포는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유전자의 한계를 벗어나는 능력을 발전시켰습니다. 바로 문화의 힘입니다. 도킨스가 밈이라 부르는 문화 유전자는 유전자의 속도를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진화된 프로그램을 문화와 결합시켜 새로운 차원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입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와 기술의 발달로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에서 벗어난 건 인간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본능과 문화 유전자가 함께 진화한 덕택에 인류는 기독교와 불교, 민주주의, 정부와 복지 제도, 알파벳, 반도체 등 찬란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능 프로그램이 문화를 생성하고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도록 원재료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문화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 행동은 문화적이며  동시에 진화적입니다. 본성과 양육은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제로섬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를 돕는 포지티즈섬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진화적 사고방식은 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죠."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힘들게 지나온 긴 시간들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재의 경제적, 문화적 과정에만 집중하죠. 하지만 한발 멀리 떨어져 볼 때 전체가 보이는 법입니다. 진화적 사고가 인간 행위의 숨겨진 본성을 비출 때 진정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진화심리학은 ‘왜’에 대한 궁극적 답을 찾으려는 최전선에 서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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