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도덕성의 차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치킨을 먹으며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포기한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비건주의자들은 그런 육식주의자의 잔인한 쾌락을 혐오한다. 치킨을 포기한 대가로 조금 덜 행복해진 사람들 말이다. 그들 중 일부가 항상 화가 나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실 나도 1주일에 한번 이상 제육과 돈가스를 못 먹으면 화가 난다. 동물의 생명권을 위해 기꺼이 제육과 돈가스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진심이다.
나 같은 사람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지 않는다. 가젤은 풀을 뜯고, 치타는 풀을 먹는 가젤을 사냥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밥을 먹으며 자신의 식탐이 윤리적으로 정당한지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만이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고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비난하고 증오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다'라는 명제는 우리가 항상 선하게 사는 존재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옳은데 그들이 틀렸다고 믿고, 그들을 교화하거나 응징하려고 애쓰는 존재라는 의미에 가깝다. 인간의 도덕성을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본다면, 나와 다른 상대방을 향한 폭력과 증오 역시 인간 도덕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어느 쪽이 옳은지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항상 고민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그 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논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양 극단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처럼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옳다'라는 관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엄격한 채식주의자처럼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옳다'라는 관점을 따를 것인가?
유용성이라는 관점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항상 즐거울 수 있다. 나에게 유익한 행동을 하면 쾌락이 뒤따른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좋아하도록 진화했다. 그래야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으니까. 사자는 직관적으로 소고기를 좋아하며, 쇠똥구리는 직관적으로 소똥을 좋아한다. 우리 역시 반쯤은 육식동물이기에 사자의 절반 정도로 치킨을 좋아한다. 나는 절반보다 훨씬 더 좋아한다. 내가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대상이 누구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일까? 내가 즐겁고 행복한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이지, 다른 존재가 아니다. 모든 동물은 자신을 우선시하도록 만들어졌거나 진화했다. 이기적 유전자가 그렇게 시켰다. 따라서 자신을 우선하는 존재들 간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도 마찬가지다.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강한 존재는 약한 존재를 이용하거나 잡아먹을 수 있다. 약자는 살기 위해 복종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 그것이 세상의 진실이다. 이익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세상은 위험한 정글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럼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중립적인 의미에서 '이기주의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원초적인 본능의 관점에서 도덕을 정의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그래, 동물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치타가 가젤을 잡아먹는 걸 보고 도덕적이지 않다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존재다. 우리는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충동과 욕망이 있음에도 행동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고 그 인식이 옳은 행동인지 고찰할 수가 있다. 성찰과 반성을 통해 욕망에 저항할 수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 저항 정신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따라서 육식을 하는 것은 인간에 한하여, 비도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욕망만을 추구한다면 그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약한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의무론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의무론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칸트다. 칸트 같이 재미없고 따분한 철학자에게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일은 철학자들의 전문 영역이니까. 의무론자들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헤쳐선 안 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늪에 빠지게 된다. 동의한다면 논쟁에 지는 것이고, 반박한다면 나쁜 놈이 되는 거니까. 그럴 때는 전제부터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 의무론자들의 아켈레스건은 전제다. 그래서 의무론자들은 자신들의 약점인 전제를 들키지 않기 위해 꼼꼼히 숨겨놓는다. 기둥이 무너지면 건물 전체가 무너지듯이, 의무론 역시 전제가 무너지면 주장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의무론자들의 숨은 전제는 다음과 같다.
- "숨은 전제 1.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되려면 그만큼 강해야 한다. 늑대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하는 토끼는 도덕적인 성찰을 할 여유가 없다. 우리가 자주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지는 건 인간이 생존과 관련 없는 고민을 할 만큼 인간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다른 동물들보다 강한 존재다."
- "숨은 전제 2. 강자는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강자인 인간이 고기를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약자인 동물을 죽이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강자는 약자를 착취할 것이 아니라 돌봐야 한다.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 "숨은 전제 3.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책임은 의무를 수반한다. 따라서 강자는 약자인 동물을 잡아먹을 것이 아니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인간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비도덕적이다."
찾았다. 의무론자들의 아킬레스건. 세 번째 전제에서 의무론자는 순환논증의 오류에 빠지고 있다. 강자인 인간은 고기를 먹기 위해 약자인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강자는 약자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간 셈이다. 결국 칸트 같이 위대한 철학자들도 순환논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언 명령' 같이 어려운 말로 약점을 숨기고 있을 뿐. 하지만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동물을 가둬놓고 기르다 잡아먹는 건 여전히 정당화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점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인간의 친척인 보노보와 침팬지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인간보다 훨씬 힘이 세면서 근육이 많은 고릴라는 골치 아프게 이런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 고릴라들은 고기에 관심이 없기에 인간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간은 가슴을 두드리며 분노하는 고릴라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오직 사피엔스만이 이렇게 쓸모없어 보이는 고민을 한다. 하지만 어떤 사피엔스는 이런 고민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반면에, 어떤 사피엔스들은 육식이 야기하는 도덕의 본질에 관해 오랫동안 질문해 왔다. 그럼 둘 중 어느 쪽이 옳은 걸까?
나는 두 입장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육즙이 넘쳐흐르는 고기를 우선하는 생각은 얼핏 이기적이고 야만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즐겁고 행복할 것 같다. 투쁠 살치살 스테이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삶은 행복할 게 틀림없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이라면, 숨겨왔던 나의 욕망을 분출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로 인해 쇠철창에 갇히는 대가는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반대로 숙성 광어회를 포기하는 대가는 크겠지만, 그만큼 우리의 인간성이 한층 더 고귀해지고 높은 차원으로 올라설 것 역시 확실하다.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얻는 쾌락이 클수록 절제하는 인내심의 가치는 한층 더 고양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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