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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들은 왜 히틀러를 지지했을까

by Catsby. 2023. 5. 4.

 

 

http://Youtube: https://youtu.be/aYJpRDt8p7g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시작되었습니다.  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의 나치 정당은 베르사유 조약의 준수를 거부하고 군의 재무장을 시작합니다. 전쟁 위기를 감지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 진영은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실패합니다. 이후 약 56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발생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많지만,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히틀러는 쿠데타나 독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권력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국민 대다수가 스스로 권위주의적인 정치에 찬동하는 것을 파시즘이라고 합니다. 파시즘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당시 독일처럼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얼마든지 히틀러 같은 인물이 권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 극우 정치인이 지도자로 당선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왜 히틀러와 나치를 막지 못하고 광기에 빠져들었을까요?

 

 에리히 프롬의『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자유가 두려워 나치즘에 빠져들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무제한적인 자유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중세 사람들은 봉건 질서와 교회의 권위 앞에서 제한적인 자유만을 누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안전과 소속감,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직업은 고정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명확한 지위와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은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하는 두려운 존재기도 했지만 동시에 용서와 사랑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죄의식을 조장했지만 신이 자신을 보살핀다는 확신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타고난 사회적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세계의 일부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정된 사회 질서 속에서 개인은 독립적인 이성과 자유를 누릴 수 없었지만, 세상의 일부에 속한 채 안정감을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말기부터 사회의 통일성과 중앙집권적인 권력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왕정과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 또는 자본가라고도 부르는 유산 계급이 등장했고, 자본주의적인 시장 경제가 나타났습니다. 부유한 상류층은 르네상스 문화와 정치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반면 하류층과 중산층, 노동자 계급은 사회 구조와 중심 가치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채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근대인들은 정치적ㆍ경제적ㆍ정신적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개인은 혼자서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했습니다. 근대 사회는 개인의 개성을 실현하고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토대까지는 제공하지 않았기에 자유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와의 끈이 끊어진 채 무기력하고 불안에 떠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근대인들, 특히 중산층과 하층민들은 그 결과 극단적인 자기 중심주의와 탐욕에 사로잡힙니다.  중세의 미신과 환상에서 벗어났지만, 사회 분위기는 경제적 합리성을 맹신하느라 이익을 우선하는 곳으로 변모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고 소원해졌고, 모두가 잠재적인 경쟁자가 됩니다. 모든 선택과 책임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해 자신보다 더 크고 강한 무언가의 권위에 복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중의 소외감과 불안, 상류층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틈을 파고들어 성공합니다. 루터는 의식적으로는 면죄부를 남발하는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분노로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앙에 의지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자신보다 강한 권위를 증오하는 동시에 존경하고 복종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 수도원의 상급자에게 복종했고, 나중에는 교황에게 반항했고 군주들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권위를 공격하기 위해 농민과 빈민층에 호소했지만 자신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자 적대적으로 돌변합니다. 대중이 자신이 존경하는 중세적 권위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개인의 존엄성과 개성을 포기하고 신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후에 국가와 민족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파시즘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중산층 역시 권위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중산층은 교회의 특권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하류층이 자신들의 특권까지 파괴할 조짐을 보이자 적대적으로 돌변했습니다. 그들은 상류층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선망하면서 동시에 분노하고 증오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봉건 질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모순되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당시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칼뱅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뱅의 신학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자기 비하와 자아의 상실이 핵심을 이룹니다. 칼뱅의 예정설은 애초에 구원받을 인간과 그렇지 못할 인간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칼뱅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을 받았고 나머지 집단은 저주를 받았다고 보고, 금욕적인 삶과 성실한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은 나치즘에도 영향을 미쳐 아리아인에 대한 찬양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로 나타나게 됩니다.

 

 칼뱅주의가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자본주의의 확대입니다. 하층계급이 부르주아를 타도하려 한 것과 달리 중산층은 부유층을 증오하면서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습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부자들에 대한 선망과 칼뱅주의가 만나 금욕과 노력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탄생했고, 미국 자본주의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의 고결해 보이는 삶은 실상 자기 비하와 적개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를 경멸하고 증오했고, 청교도들의 양심은 자기 자신마저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부정하는 자기 비하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은 목적이 아닌 도구에 불과했으며, 물질적인 탐욕이 그들의 진짜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근대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우선, 자신이 생산하는 물질과 자본에 종속되는 도구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고, 그 허무함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관계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거나 만족하지 못한 채, 항상 불안해하면서 남을 질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더욱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항상 무언가에 의존하려 합니다.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연인을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지배욕,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탐욕,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권력욕, 국가와 민족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과 우월감, 극단적인 신앙심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간에 심리적으로 자신의 개성과 자아를 포기해 자유의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타인, 특히 약자에게 더욱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은 가학적(마조히즘)인 충동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엔 강하고 당당해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외로움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지배함으로써 자존감을 얻으려 합니다. 스스로 세상과 독립적인 관계를 맺을 힘과 용기가 없기에 항상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지배하거나, 폭력을 행사해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강자를 존경하는 동시에 약자를 공격하고 모욕하고 싶어 합니다. 약자가 무력할수록 무기력한 자신을 연상시키기에 더 증오하고 분노합니다. 심리테스트를 해 보면 자신을 ‘사악’, ‘쓰레기’ 같은 단어와 연결 짓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자신이 믿는 권위가 약해지면 사랑과 존경은 경멸과 증오로 바뀝니다. 연인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이들은 사랑해서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지배할 대상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연인이 떠난다고 하면 그 순간 관계는 역전됩니다. 지배할 대상이 없으면 그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피학적(사디즘)인 성향의 사람들 역시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학적 경향은 흔히 사랑이나 애정, 충성심, 존경, 희생으로 위장되지만 허무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이 숨어있습니다. 자유를 포기한 채 자기밖에 있는 더 크고 강력한 전체의 일부가 되어 그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태도 모두 자유의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같은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두 성향은 서로를 돕는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심리 메커니즘이 현실에서 집단적으로 구현된 것이 나치즘입니다. 

 

 파시즘의 한 형태인 나치즘은 자유를 두려워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해 성장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재와 파시즘은 정반대입니다. 파시즘의 가장 무서운 점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권위주의에 복종한다는 점입니다. 합리성과 이성을 믿었던 근대에 파시즘과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 사회와의 연결을 잃어버린 채 혼란과 분노, 적개심과 불안에 빠져있었고, 외부의 강한 무언가에 소속되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합리성으로 포장해 민족과 국가를 찬양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지도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의 심리를 예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들은 민족적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분노와 상실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중산층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모은 돈을 전부 날려버렸고, 전쟁에 참여한 유능했던 군인들은 보잘것없는 직업을 전전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때마침 독일인들의 분노와 상실감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리는 히틀러가 나타납니다. 히틀러는 인종에 대한 우월감을 자극해 패배감을 보상해 주었고, 다시 독일을 위대하게 만들자고 주장함으로써 삶에 대한 목표를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결국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나치의 광기에 빠져듭니다. 히틀러 역시 루터처럼 대중은 지배를 받는 게 소망이라고 말하면서 대중을 경멸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개인이 “~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에서 “~로의 적극적 자유”를 얻는 데 실패한 데 있습니다. 근대인들, 그리고 현대인들까지도 이 적극적 자유를 이루는 데 실패한 듯 보입니다. 진정한 자유란 스스로의 독립성과 개성을 가지고 세상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으며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홀로 서는 자유의 부담이 두려워서 더 큰 무언가의 부품으로 소속되어 자유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중세처럼 미신과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서 무언가의 일부가 되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누구나 자유와 대면해야 하는 문제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오직 스스로의 자유를 찾는 방식으로만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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